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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자료 & NEWS2012/05/16 04:43

[중앙일보] 입력 2012.05.16 01:00 / 수정 2012.05.16 01:03

이명박 대통령이 15일 ‘아웅산 폭탄테러 사건’ 발생 29년 만에 우리나라 정상으로는 처음으로 참사 현장인 아웅산 국립묘지를 찾았다. 참배를 끝낸 이 대통령이 수행원들의 삼엄한 경비를 받으며 걸어 나오고 있다. 작은 사진은 1983년 10월 9일 버마(당시 국가명) 아웅산 국립묘지에서 발생한 폭탄테러 직전 전두환 대통령의 수행원들이 도열해 있는 모습. 왼쪽부터 함병춘 대통령 비서실장, 이계철 주 버마대사, 서상철 동력자원부 장관, 김동휘 상공부 장관, 이범석 외무부 장관, 서석준 부총리. [양곤=연합뉴스]

이명박 대통령은 15일 미얀마의 옛 수도 양곤에 있는 아웅산 국립묘지를 방문해 헌화했다. 1983년 10월 9일 오전 10시25분 전두환 전 대통령이 하려다 북한의 테러로 못하게 된 지 28년 219일 1시간여 만이다.

 이 대통령은 ‘17대 대한민국 대통령 이명박’이라고 쓰여진 조화를 놓고 김성환 외교통상부 장관, 홍석우 지식경제부 장관, 김대기 경제수석 등 일행과 함께 묵념했다.

 이 대통령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미얀마 신 정부(첫 민간정부)가 들어서서 첫 국빈으로 방문한 것이기 때문에 아웅산 국립묘지를 찾아오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다. 이곳이 17명의 고위 관료들이 희생된, 20세기 역사에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던 곳이기 때문이다. 이런 역사는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겠다.”

 이 대통령이 묘지에 머문 시간은 2분여. 테러의 아픔 때문에, 미얀마와 북한과의 특수관계 때문에 삼엄한 경계 속에 이뤄진 조문이었다.

 이 대통령은 이에 앞서 아웅산 수치 여사와 만났다. 수치 여사가 이 대통령이 머무는 호텔로 예방하는 형식으로다. 두 사람은 활짝 웃는 얼굴로 만나 40여 분간 대화했고, 20분간 기자들 앞에 섰다. 이 대통령은 수치 여사와 면담할 때는 버마라는 국호를 썼다. 수치 여사를 탄압한 군사정권이 89년 버마라는 국호를 미얀마로 바꾼 점을 감안한 것이다.

 하얗게 바랜 것은 당시 중상을 입은 최금영 연합통신 사진부장의 피가 필름에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양곤=연합뉴스]


 이 대통령은 회견에서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 민주주의가 희생돼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며 “경제를 살리는 만큼 민주주의도 함께 중요한 과정”이라고 했다. 또 “수치 여사가 긴 시간을 오로지 버마 국민들을 위해 민주화와 인권 신장 등 여러 가지 중요한 문제에서 일관되게 지켜와 버마의 변화를 가져온 시초를 열었다는 점에서 매우 존경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수치 여사는 “우리의 어린 세대들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아 원하는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며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평화와 번영이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건 우리 국민들이 존엄성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참 민주주의는 국민 스스로 자신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며, 국민에 의해 이뤄지는 민주주의”라며 “세계의 도움이 특정 그룹, 특정 개인, 특정 정부에만 이용되는 게 아니라 국민들에게 도움이 돼야 한다. 그게 우리의 목표”라고 했다. 또 “이 대통령이 버마의 실상을 이해한 것에 크게 고무된다. 큰 힘이 됐다”고도 했다.

 ◆탈북자 석방하기로=테인 세인 미얀마 대통령은 14일 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2010년 3월부터 불법 입국 혐의로 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40대 남성 탈북자를 석방할 뜻을 밝혔다고 김태효 청와대 대외전략기획관이 15일 전했다. “이 탈북자는 며칠 내 한국에 올 수 있을 것 같다”고 김 기획관은 말했다.

 미얀마는 북한과의 무기 거래를 중단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테인 세인 대통령은 이 대통령에게 “유엔 안보리 결의안 1874호를 잘 준수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1874호는 북한 무기 금수(禁輸)가 골자다. 세인 대통령은 또 “과거 10㎿급 러시아 교육용 원자로 두 기를 지원받는 방안을 추진하려다 포기한 적이 있다”고 소개했다.

Posted by 마웅저
버마자료 & NEWS2012/05/01 00:18

[이미지프레시안] 버마 군부에 저항한 카렌족의 태국 난민캠프
장준희 사진가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70120425174932

 

사진가 장준희 씨가 태국에 있는 버마 난민캠프를 찾았습니다. 버마 군부에 저항하다 내쫓긴 카렌족이 모여 사는 마을입니다. 사진가는 이곳에서 오랜 군부 독재가 할퀸 버마의 오래된 상처를 가까이서 기록했습니다. 현지에서 그는 '버마의 봄'을 기다리는만큼 '버마의 아픔'부터 보듬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군부에 저항하다 쫓겨나 타국에 난민으로 살면서 지금도 버마 군부가 매설한 지뢰에 희생되는 카렌족의 기구한 이야기를 전하려는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아웅산 수치 여사의 화려한 복귀와 민주화에 대한 기대에 앞서, 카렌족의 절망과 희미한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편집자>

지난 4월 1일, 버마에 총선이 있었다. 아웅산 수치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의 압승으로 선거는 끝이 났지만, 이번 선거에 기대를 걸고, 귀향을 꿈꾸는 카렌족 난민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오히려, 버마 정부에 대한 불신으로 외국으로의 이주와 태국사회로의 동화를 꿈꾸는 젊은이들이 훨씬 많았다. 그렇게 그곳에는 지난 세월의 폭력과 억압, 분쟁의 상처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아무런 보상과 위로 없이 남겨져 있었다.

태국 최대의 버마 난민캠프인 멜라(Maela) 난민캠프로 가는 길은 생각만큼 어렵거나 검문이 심하지는 않았다. 태국 북부 버마와 국경을 마주한 메솟 시내에서, 곧게 뻗은 길을 따라 북으로 한 시간여 달리자, 왼편으로 아름답고 이국적인 마을이 보였다. 이 길을 지나는 여행객이라면 누구나 차를 멈추고 사진에 담고 싶어할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나뭇잎을 차곡차곡 쌓아 올려 만든 지붕과, 나무로 만들어진 벽과 기둥, 캠프를 둘러싼 우뚝 솟은 우거진 산과 마을과 마을 사이를 유유히 흐르는 강물. 오렌지아침 햇살과 낙엽을 태우는 연기에 둘러싸인 신비로운 분위기로 가득찬 그 '아름다워 보이는' 마을이 바로 카렌족의 멜라 난민캠프였다.

 


ⓒ장준희


1984년 문을 연 멜라 난민캠프는 공식통계대로라면 현재 약 4만여 명이 살고 있다. 그 중 약 98퍼센트가 카렌족이다. 카렌족은 버마 군사정권에 저항하다 탄압받은 민족으로 자치권을 요구하며 지금까지 무장투쟁을 이어오고 있다. 버마 정부는 지난 1월 카렌족과의 휴전을 합의했다고 발표했지만, 전투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실제로 카렌민족해방군의 게릴라 병사들이 치료와 물자를 얻기 위해 캠프에서 몇일간 머물다 떠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캠프에 도착한 뒤 앞으로 머물 한 학교에 짐을 풀고, 학교 학생의 안내를 받아 캠프를 둘러보았다. 식료품과 의료, 가전제품 등을 파는 상점들과 종교 시설, 병원과 기숙사까지 난민캠프지만 없는 게 없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에 남은 곳은, KHWA(Karen Handicap Welfare Association) 케어 빌라. 카렌민족해방군의 지뢰피해 군인들과 민간인들이 숙식을 함께 하며 거주하는 시설이었다. 지뢰 피해자들은 지뢰 해체작업을 하거나, 지뢰를 밟아 상해를 입어 팔이 없거나, 다리가 없고 앞을 볼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들과의 첫 만남은, 그들이 부르는 합창 소리와 함께 시작됐다. 20여명의 시설 거주자들은 일주일에 세 번, 2시간씩 합창 연습을 한다. 대부분이 기독교인인 이들은, 섭씨 35도에 가까운 무더위 속에서 땀을 흘려가며 진지한 모습으로 찬송가를 부르고 있었다. '사진쟁이'인 나에게 그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이었다. 그들에게 어떤 아픔과, 어떤 고통이 있는지를 생각해 보기도 전에, 그곳에 머물며 취재를 하기로 결심했다. 처음에는 '이미지'만을 쫓으려던 가벼운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약 3주간을 그들과 함께 보내면서 나는 숨겨져 있던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하나씩 알아가게 되었다.

▲ 버마 군부가 매설해 놓은 지뢰로 인해 캠프에는 장애를 가진 카렌족이 많다. ⓒ장준희

ⓒ장준희

ⓒ장준희


악으로 상처를 치유하는 소년, 에다위

시설에서 가장 어린 에다위(14)는, 네 살때 버마군의 폭격으로 눈이 보이지 않게 됐다고 했다. 2009년부터 가족과 함께 캠프로 이주했지만, 경제적인 사정으로 가족과 떨어져 혼자 이 시설에서 지내게 됐다. 에다위는 절대음감을 가진 특별한 아이였다. 3년 전에 이 시설에서 지내면서부터 시작한 기타와 피아노는, 그 누구의 지도 없이 혼자 터득한 것이었다. 그야말로 음을 듣기만 하면 칠 수 있는 '절대음감' 의 소유자다.

"버마 군부가 무엇이 나쁜지, 카렌의 역사가 어떤지 잘 몰라요. 그런데 나는 기억을 하지 못하지만, 누나가 버마군에 납치됐다고 해요"

"이곳에 있으면 노래도 부를 수 있고, 기타도 칠 수 있고, 피아노도 칠 수 있어요. 꿈은 기타리스트가 되어 록밴드를 하는 것이에요"

그는 낡은 기타와 몇몇은 음이 쳐지지도 않는 전자 피아노를 소중한 듯 만지며 이야기한다.

▲ 에다위는 지뢰 피해로 앞을 볼 수 없다. 그러나 혼자서 기타와 키보드를 터득했다. ⓒ장준희

▲ 사람들에게 음악을 연주해주는 에다위 ⓒ장준희

군부에 대항해 입대한 남자들. 그리고 가족

에다위를 제외한 나머지 19명은, 모두 카렌민족해방군 출신이다. 그들이 군에 지원하게 된 이유는 모두 닮아있다. 버마군의 억압과 약탈, 폭력에 대항하기 위해서다.

마부(22)는, 2004년 농부였던 그의 아버지가 이유 없이 총아 맞아 죽게 된 후, 학업을 중단하고 가족을 위해 농부가 되었으나, 계속되는 버마군의 폭행과 약탈로 16세에 군에 지원했다.

"가족은 모두 여섯 명 인데, 쌀은 물론 양파 하나 남김없이 모두 빼앗아 가고, 일어서기 힘들 정도로 때렸어요. 반드시 복수를 하고 싶어서, 상처가 낫자마자 군에 지원했어요"

그렇게 군에 지원하여 카렌민족해방군 제3여단에 편입된 그는 2009년 3월 19일 지뢰 해체작업 중 부상을 입고 이곳으로 옮겨지게 됐다. 마부는 말한다.

"그래도 이곳에 옮겨진 피해자들은 운이 좋은 겁니다. 대부분의 IDP(individually Displaced Person), 지역 정글 속에 남겨진 부상병들은 열악한 시설과 환경에서 고통 받고 있습니다." "이곳에선 적어도 밥을 굶을 걱정은 없어요. 따지고 보면 내가 태어난 뒤로 가장 편하고 안락한 생활을 하고 있는 거에요"

▲ 마부는 버마군의 폭행과 약탈에 시달리다 군에 입대했다. 지금은 눈과 팔을 읽었다. ⓒ장준희

이 시설에는 4인 가족이 함께 생활을 하고 있기도 하다. 파투(45)와 그의 아내 무낭(40), 아들 밍야위(13) 조카 무무(11)는 2011년부터 함께 이 시설에서 지내고 있다. 파투 역시 평범한 농부였으나, 버마 군의 약탈과 폭력, 터무니 없는 세금징수로 2000년, 가족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군에 입대했다. 그의 가족은 버마의 수도 양곤으로 돈을 벌러 간 줄로만 알았다고 했다.

2002년, 11월 파투 역시 지뢰해체 작업 중 피해를 입고 2004년 멜라 캠프로 옮겨져 혼자 생활을 해왔다. 그가 군에 입대한 2000년부터 아내 무낭과 세 아들이 캠프에 오게 된 2011년까지 파투는 12년간 가족과 만날 수 없었다. 그 동안 홀로 남겨졌던 그의 아내 무낭은 가족부양을 위해 닥치는대로 일을 하며 지냈다. 4년 간 아무런 연락이 없어서 남편이 죽은 줄만 알았다. 너무 고통스러웠지만, 남겨진 세 아들을 위해 닥치는대로 일 할 수밖에 없었다. 세 아들 중 막내 밍야위는, 캠프에 와서야 처음으로 아버지 파투의
얼굴을 보았다고 했다.

"아빠가 팔이 없고 눈이 보이지 않아 처음에는 무서웠어요, 그렇지만 지금은 아빠와 함께 살게 되어 너무 행복해요. 또, 캠프에서는 학교도 다닐 수 있고, 밥도 매일 먹을 수 있어서 너무 좋아요"

무낭은, 남편의 부상 사실을 알게 된 2004년, 남편이 많이 원망스럽고 하늘이 무너 지는 줄 알았지만, 이제는 편한 곳에서 모두 함께 지낼 수 있게 돼 너무 기쁘다고 말한다. 그녀의 첫째, 둘째 아들은 지금 방콕에서 일을 하고 있다. 모두들 이 난민 캠프가 '편한 곳'이며, 인사이드 버마의 정글 속 난민들의 비참한 생활에 비하면 너무도 운이 좋은 것이라고 했다. 그녀는 조카 무무도 데리고 있다. 무무는 어릴적 버마군의 공격으로 부모를 잃어 부모의 얼굴도 모른채 파투와 무낭을 부모로 알고 지낸다고 한다.

▲ 파투와 무낭. 버마군에 저항하기 위해 입대해 눈과 팔을 잃은 파투에게 아내 무낭이 담배불을 붙여주고 있다. 무낭은 남편이 죽은 줄 알고 혼자 온갖 고생하며 세 아이를 키웠다. ⓒ장준희

▲ 파투가 아내 무낭의 조카인 무무와 걷고 있다. ⓒ장준희

▲ 무무를 안고 있는 파투. ⓒ장준희

지원 끊긴 멜라 캠프, 고립무원의 지뢰 피해자들

그렇지만, 이들에게도 당장 닥친 걱정이 있다. 올 4월부터, 이들을 지원해 오던 CPI(Clear Path International) NGO단체로부터 금전 지원이 끊겼기 때문이다. 한달 에 약 50,000밧 (약 180만원)의 지원이 끊기게 되면, 부상 후유증에 대한 지속적인 케어와, 진통제 등의 약품 공급 역시 힘들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말라리아 등 각종 질병에 노출되기 쉬운 환경 속에, 중병의 경우 난민캠프 밖 태국의 병원시설로 옮겨져 치료를 받게 되는데, 태국의 보험적용을 받지 못하는 난민 신분으로서 그 치료비의 부담 또한 감당하기 힘들어지게 된다. 합창과 채플수업, 영어, 연극 등을 지도하는 교사월급(한 달에 1000밧=약 3만7천원) 의 지급 역시 중단되게 된다.

"이들은 버마 군부와 카렌민족과의 분쟁에 있어서 직접적인 피해를 본 가장 상징적인 존재인 동시에, 모두가 보살펴야 할 존재들입니다. 동버마, 카렌족이 많이 살고 있는 카렌주 등지의 지역에는, 버마 군이 카렌족을 위협하기 위해 마을 한복판에 지뢰를 설지하거나, 큰 도로에 지뢰를 설치해 놓았습니다. 정확한 통계가 없지만, 세계에서 가장 지뢰가 많이 묻혀있는 곳일 겁니다. 버마 군부는 보여지는 민주화를 서계 언론에 선전하기 전에, 지뢰 제거작업과 카렌족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부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카렌족 그 누구도 버마 정부를 믿지 않습니다"

러라이(40) 시설 주임의 말이다.

'버마의 봄'은 올까?

과연 버마에 봄은 올까?.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세계가 버마에 대한 경제 제제를 완화하고, 중국, 일본, 한국 등의 동아시아 기업들 역시 버마로의 진출을 가속화 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건 이방인이며, 경제적인 논리로 버마를 바라보는 입장에서의 '보여지고 있는' 민주화에 지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버마 정부의 '민주화, 평화, 개방'의 선전의 뒤에는 오늘도 타국 땅에서 꿈과 희망 없이 살아가는 십만여 난민들이 있다. 뻔히 보이는 선전보다는, 그 뒤에 숨겨둔 버마 정권의 지뢰와 폭력에 대한 해결, 분쟁 피해자들에 대한 진심어린 사과와 보상에서부터 진정한 버마의 봄이 시작 되는 게 아닐까.

ⓒ장준희

▲ 젊은이들은 태국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상당수의 젊은이들이 버마로 돌아가기보다 태국으로의 흡수를 바라고 있다. ⓒ장준희

ⓒ장준희

▲ 버마 군부는 카렌족을 괴롭히기 위해 캠프 주변에 수많은 지뢰를 매설해 놓았다. ⓒ장준희

ⓒ장준희

 

 


Posted by 마웅저
버마자료 & NEWS2012/04/02 16:36

시민들 환호하면서도 "작은 진전일 뿐" 냉정 잃지 않아

 

아시아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아웅산 수치(67) 여사가 역사적인 버마(미얀마) 의회 입성에 성공했다. 1990년 선거에서 수치의 민족민주동맹(NLD)에 압승을 선사했지만 군부의 권력 이양 거부로 독재 치하에서 신음했던 버마 국민들이 22년 만에 희망의 불씨를 지펴 올렸다.

버마에서는 1일 45개 선거구에서 하원의원 37명과 상원의원 6명, 지역의회 의원 2명을 선출하는 보궐선거가 치러졌다. NLD 고위 당원인 틴 우는 이날 투표가 끝난 후 "자체 집계 결과 수치 여사는 82%의 득표율로 당선이 확실시된다"고 선언했다. 버마의 옛 수도 양곤 외곽의 카우무에서 하원 선거에 출마한 수치 여사는 이로써 제도권 정치권에 처음으로 진출하게 됐다.

틴 우는 또 "NLD 소속 모든 출마자들의 당선이 유력시되고 있다"고 밝혔다. NLD는 44개 선거구에 후보를 냈고, 이같은 결과는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이었다. 미얀마 선거관리위원회가 선거 결과 발표 날짜를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1주일 내에 발표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투표 후 양곤 외곽에 있는 NLD 건물 밖에 모여든 수백명의 지지자들은 전광판에 수치의 승리 소식이 표시되자 그의 사진을 흔들며 환호했다. 65세의 화가 킨 마웅 민트는 <뉴욕타임스> 기자에게 "춤을 추고 싶을 정도로 기쁘다"라며 "NLD 후보들이 군부가 내놓은 후보들을 이겨서 너무 기쁘다. 민중들을 대표하는 정당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아웅산 수치 사진을 들고 환호하는 버마 사람들 ⓒAP=연합뉴스


그러나 NLD가 후보를 낸 44개 지역구에서 모두 승리한다고 해도 의회에서 차지하는 의석수는 전체의 7%에도 미치지 못한다. 대부분의 의석은 군부와 친군부 성향의 통합단결발전당(USDP)이 장악하고 있어서 반민주적인 조항이 포함되어 있는 2008년 헌법을 다시 고치는 등 입법 활동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같은 '상징적인 승리'에 대해 NLD 지지자인 우 민 저우는 "(이번 승리는) 첫 걸음을 뗀 것에 불과하다. 민주주의로 아주 조금 다가갔을 뿐이다"고 냉정함을 유지한 뒤 "그래도 미래는 더 밝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선거는 18개월 전까지 군부가 지배했던 버마가 얼마나 민주주의로 나아갈 수 있을지를 가늠하는 바로미터라고 여겨졌다.

이날 투표에 앞서 수백명의 해외 언론 기자들과 선거 감시단은 선거를 취재하고 투표 상황을 감시하기 위해 버마에 들어갔다. 버마 정부는 공정하고 자유로운 선거를 보장하는 차원에서 미국, 유럽연합(EU),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 등의 참관인들이 선거 진행과정을 감시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뉴욕타임스>는 유권자들이 투표를 하거나 자신의 정견을 밝히는데 있어 과거보다 더 자유로움을 느꼈다고 전했다. 투표를 마친 전직 교사 치 치 툰은 신문에 "과거 우리는 외국인들과 민주주의에 대해 말하는 것을 두려워했지만 이제는 용기가 생겼다"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에서 투표용지 조작 등의 부정 선거 의혹이 제기됐다. 하지만 미국, 호주, 유럽연합(EU) 등 서방 국가들은 투표가 비교적 공정하게 진행됐다고 평가하며 버마에 대한 제재 해제를 적극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이날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최근 있었던 버마의 진전이 무엇을 의미하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인지 말하기는 너무 이르다"면서도 "최악의 억압 정부도 개혁될 수 있고 최악의 폐쇄 사회도 개방될 수 있다는 걸 확인하게 되어 기운이 난다"고 말했다.

버마는 1962년 군사 쿠테타 발발 후 50년간 군부에 의해 통치되다가 2010년 총선을 통해 형식적이나마 민간정부가 들어섰다. NLD는 그해 총선을 보이콧했지만, 정부가 수치 여사에 대한 가택 연금을 해제하고 점진적인 개혁 정책을 펴자 이번 보궐선거에 참여하게 됐다. 버마 정부는 이같은 개혁 조치를 통해 서방 국가들이 가하고 있는 제재가 해제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미국은 중국 포위 전략의 일환으로 버마와 관계 개선을 추구하는 중으로 지난해 11월 클린턴 국무장관이 미 국무장관으로서는 반세기 만에 처음으로 버마를 방문하기도 했다.

 

황준호 기자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120402015634  

 


Posted by 마웅저
버마자료 & NEWS2011/12/13 15:03

세인 대통령 등 민정 지도부 잇단 개혁 조치…재스민 혁명과 국제사회 압박도 큰 영향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truth21c@empal.com 


노벨평화상 수상자이자 미얀마 민주화운동의 상징인 아웅산 수치(66) 여사. 퍼스트레이디와 상원의원을 지낸 힐러리 클린턴(64) 미국 국무장관. 두 여걸(女傑)의 만남은 ‘역사적’이라는 수식어가 모자랄 정도다. 미얀마 독립의 영웅인 아웅산 장군의 딸인 수치 여사는 온몸으로 군사독재에 항거해온 투사다. 야당인 민족민주동맹을 이끌어왔던 수치 여사는 1989년부터 지난해 11월까지 21년간의 정치생활 중 15년을 가택연금 상태로 지냈다. 클린턴 장관의 정치경력은 남편 빌 클린턴 전 대통령만큼이나 화려하다. 남편의 임기 말인 2000년 11월 상원의원에 당선된 그는 2006년 재선에 성공했다. 2008년 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에 나섰다가 버락 오바마 현 대통령에게 패배했고, 2009년부터 국무장관을 맡았다. 클린턴 장관은 11월 30일부터 12월 2일까지 미국 국무장관으로는 56년 만에 미얀마를 방문했다. 두 사람의 만남이 더욱 특별한 것은 이 때문이다.


정치범 석방 등 극적 변신


미국은 미얀마를 아직도 ‘버마’라는 국명으로 부른다. 1989년 국명을 바꾼 미얀마 군정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얀마의 통치체제는 3월 30일 테인 세인(66) 총리가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군정에서 민정으로 바뀌었다. 세인 대통령은 철권통치를 해온 독재자 탄 슈웨 장군 밑에서 2007년 10월부터 총리를 지내며 수치 여사를 비롯한 민주화 운동가들을 탄압해왔던 군부의 제4인자였다. 지난해 총선에서 군복을 벗고 민간인 신분으로 의원에 당선됐던 세인이 대통령을 맡은 것도 군부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


그랬던 세인 대통령이 갑자기 개혁주의자로 변신, 민주화 조치를 잇달아 단행하자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놀라고 있다. 실제로 세인 대통령은 10월 정치범 2100여 명 중 300여 명을 사상 처음으로 석방했다. 국가인권위원회 설치, 노동조합 결성과 파업 허용, 언론과 인터넷에 대한 검열 완화, 평화적 집회 및 시위 허용 등 군정 치하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조치가 이어졌다. 특히 수치 여사의 정치활동을 막기 위해 수감자의 정당 활동을 금지했던 정당등록법도 개정됐다. 이제 민족민주동맹은 공식적으로 활동할 수 있으며, 수치 여사는 앞으로 실시될 의회 보궐선거에 출마할 것으로 보인다.


세인 대통령과 미얀마 정부가 이처럼 극적으로 변신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세인 대통령 등 현 민정 지도부가 아랍 각국의 시민혁명으로 독재정권이 붕괴된 것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폐쇄적인 독재체제를 고집할 경우 정권 유지조차 힘들 것이라는 위기감을 느끼고 과감하게 개혁조치에 나섰다는 분석이다. 8월 수치 여사를 처음 만난 세인 대통령이 “정부와 불편한 관계에 놓인 정치세력과의 긴장 완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밝힌 것도 같은 맥락이다. 수치 여사도 “세인 대통령이 진정한 변화를 원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세계 최악의 독재자 중 한 명으로 불렸던 미얀마 군부의 실력자 탄 슈웨 장군.

다음으로는 미국 등 국제사회의 강력한 제재조치에서 벗어나려는 의도로도 읽을 수 있다. 군부 제3인자였던 쉐 만 하원의장은 “미얀마는 미국과의 정상적인 관계를 희망한다”면서 “양국관계 개선의 길은 열려 있다”고 강조했다. 미얀마 정부는 밀월관계를 맺어온 중국과 거리를 두겠다는 제스처도 보였다. 실제로 미얀마 정부는 9월 30일 중국 정부와 공동으로 이라와디 강에 건설 중이던 36억 달러 규모의 미트소네 댐 공사를 중지했다. 당시 우나 마웅 르윈 미얀마 외무장관은 미국 국무부 초청으로 워싱턴을 방문 중이었다.


끝으로 2014년 아세안 의장국이 되는 것을 계기로 국제사회 일원으로 복귀, 경제발전을 적극 추진하겠다는 전략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미얀마는 아시아 출신으로는 사상 첫 유엔 사무총장인 우 탄트(재임 1961~71년)를 배출하는 등 과거 아세안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천연가스를 비롯한 각종 자원의 보고인 미얀마로서는 국제사회와 적극 협력하는 전략이 경제 도약의 디딤돌이 될 수 있다.


‘북한 지원받고 핵무기 개발’ 공개하나


거꾸로 워싱턴의 눈으로 보자면 클린턴 장관의 이번 방문은 적극적인 포용정책의 일환이다. 미국은 지금이야말로 미얀마 정부가 민주화 개혁조치를 더욱 강력하게 추진할 수 있도록 적극 개입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는 적대국과 대화를 통해 민주화 개혁을 유도한다는 오바마 대통령의 독트린에도 부합한다. 미국은 또 미얀마와의 관계 개선을 통해 북한이나 쿠바 같은 다른 독재정권에게 메시지를 보내려는 의도도 갖고 있다.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원한다면 민주화 개혁을 수용하라는 의미다.


물론 가장 중요한 이유는 중국에 대한 견제다. 그동안 중국에 일방적으로 치우쳤던 미얀마를 자국 편으로 끌어들일 경우 미국으로서는 중국에 대한 견제를 강화하는 데 상당한 효과를 거둘 수 있고, 친(親)중국 성향인 라오스와 캄보디아 등 다른 아세안 국가와의 관계도 강화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오바마 정부는 최근 몇 개월간 커트 캠벨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 데릭 미첼 미얀마 담당 특사, 마이클 포즈너 국무부 인권 담당 차관보 등을 보내 미얀마 정부와의 대화에 공을 들여왔다.


클린턴 장관의 방문을 계기로 미국이 이른 시일 안에 미얀마에 대한 경제제재 조치를 해제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워싱턴은 여전히 미얀마 정부의 진정성에 대해 의구심을 거두지 않는다. 클린턴 장관은 세인 대통령에게 모든 정치범을 석방하고 소수민족 반군과 대화에 나서는 등 민주화 개혁조치를 지속적으로 추진할 것을 주문했다. 미국은 또 북한과의 무기거래 중지, 인권탄압 중단 등도 함께 요구하고 있다. 특히 공화당 소속인 리처드 루거 상원의원은 미얀마가 북한 지원을 받아 핵무기 개발을 추진했다는 점을 완전히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얀마 정부가 이런 요구사항을 모두 수용할지는 아직 미지수다. 세계 최악의 독재자 중 한 명으로 불렸던 탄 슈웨 장군이 여전히 건재하기 때문이다. 군부 출신 인사들이 만든 집권여당 통합단결발전당(USDP)은 의회를 완전히 장악한 상태고, 상하 양원 의석의 25%는 현역 군인이다. 국가 주요 기관의 핵심 요직도 모두 군부 출신인 데다, 헌법에는 국가비상사태가 발생했을 때 대통령이 모든 권한을 군부에 넘기도록 명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세인 대통령과 미얀마 정부의 민주화 개혁조치 속도는 앞으로 더 빨라질 것으로 보인다. ‘미얀마의 봄’은 아직 멀었지만, 그래도 봄이 오는 소리는 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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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마웅저